철없던 18세의 소녀는 쌍둥이 엄마가 되었다. 자기 자식이 아니라며 유전자 검사까지하였다. 그냥 사라졌다. 혼자 살아가야 하는 삶은 캄캄한 터널에 갇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즈음에 한국소년보호협회와 연결이 되었다. 팀장이라는 분이 첫 만남에서 너무 안타까웠는지 빨리 군포로 이사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따스한 곳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참으로 평안했다. 협회의 도움을 받아 가정법원을 통해 이혼 정리도 하고 행복한 홀로서기를 하면서 용기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둘째인 아들이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늦게 터지려나 했지만 검사 결과는 언어장애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경기중앙교회 권사님들의 돌봄과 언어치료 지원은 많은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어느 날은 검찰청에서 벌금 300만원을 납부하지 않을 경우 노역장에 유치한다는 내용의 통지서가 왔다. 잡혀가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생각하니 뜬눈으로 몇 날 밤을 지새워야 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방법이 없었다. 고민 끝에 함께해 주시는 멘토 아빠에게 부탁해 보아야겠다는 용기가 생겨서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매월 10만원씩 갚겠다고 했다.
검찰청에 300만원을 대신 입금해 주셨다는 연락을 받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갚겠다는 약속만 믿고 큰돈을 대신 내어주신 멘토 아빠가 너무 감사해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상시에도 늘 부족함을 채워주셨는데 이제 자유까지 선물해 주셨다.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약속을 잘 지키는 일이었고 2년간 입금해 드렸더니 이제 그만하라고 말씀하신다. 작은 아픔과 어려움을 헤아려 주시는 모습은 친아버지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따스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뒤로한 채 고향인 의정부로 이사를 했다. 형제 곁으로 가서 사랑을 받기보다
가족에게 사랑을 나누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나름 계획을 세워가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카페 오픈이 쉽지가 않았다. 멘토 아빠께 연락을 드렸다. 준비를 다했는데 부족한부분이 조금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곧바로 채워주시고 개업하는 날에는 지인과 함께
찾아오셔서 색소폰 축하연주회까지 해 주셨다. 행복한 이 순간이 쭉 이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급격히 나빠진 집안 사정으로 카페를 폐업해야 했고 아버지께서는 말기 암 판정을받아 돌아가셨다. 가족과 연결된 채무의 문제로 풍비박산이 되었고 동네 폐업한 중국집에서 아이들과 지내야 했다. SOS할 곳은 한 곳 밖에 없었다.
"이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냥 하루하루가 고통이에요. 그냥 다 포기할래요. 그냥 애들이랑 너무 힘들어요. 이렇게 쓰레기가 가득한 곳에 애들이랑 있어요. 죄송해요 아빠"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아 악몽의 시간이 지나갔다.
요 사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멘토 아빠가 보고 싶어 연락을 드렸다. 당장에 오라고 하셔서 전철을 탔지만 돌고 돌아 오후 3시에 만날 수 있었다.
여전히 따뜻함으로 대해주시며 손주들이 기억해 준다고 좋아하시면서 용돈 봉투도 주시고 좋아한다는 돼지갈비를 사주셨다. 네 마디 정도의 말밖에 하지 못하고 뻑뻑 소리치는 손주를 보시며 왜 구석자리로 가자고 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하시면서 눈가가 촉촉해 지신다. "고생을 많이 하고 있구나" 하시는 한 마디 위로에 무엇인가 맺혔던 체증이 뻥뚫려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음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얼마 후 '국악을 배우고 싶은데
엄마에게 말을 할 수 없다'라는 손녀의 메시지가 왔다고 연락해 오셨다. 어떻게 도우면 좋을까? 하신다. 나에게는 늘 산소통 같은 멘토 아빠다. - 김뽐이 -